0. 구글/애플 헬스장에서 트레이너로 근무하다 구글 헬스케어팀에서 researcher로 있다가 박사 공부하러 오는 Abraham이라는 친구가 싱가포르로 넘어왔다. 옛날에 대학에서 미식축구 팀 트레이너도 하고 NFL 선수들 코칭도 하고 했다는데 연구실 출근하기 시작하면 같이 운동가서 운동 좀 배워야겠다. 히히.
1. 요즘 문득 하는 생각인데 인생사가 참 사필귀정 거자필반이다.
처음에는 만사가 올바르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결국 "모든 일은 반드시 올바르게 돌아갈 것"이라는 뜻이다.
2. 중1까진 야구선수 하겠다고 운동만 하다가 피지컬이 기본인 동네에서 150cm도 안되는 꼬맹이는 1년 유급이 아니면 진학이 어려웠기게 부모님의 반대로 운동을 접었다. 이후론 스포츠 재활 의학 같은걸 하겠다고 의대를 목표로 공부를 했었다.
3. 그러다 고1때 시원하게 무릎을 조져먹고 수술 3번, 한 달동안 학교를 못나가고 이후에도 한 달동안 휠체어 신세를 졌고 수업을 못들으니 자연스럽게 내신이 3등급 가까이 나락을 갔다. 물론 내가 병원에서 공부를 게을리한 것도 있다. 그리고 대학와서 십자인대 끊어먹고 수술 한 번 더하고 군면제까지 받았으니 뭐 이득인가? 아니였으면 부건이랑 같이 해병대 갔을거다.
4. 각설하고 내신이 망한 덕에 당시 담임 선생님은 정시 전환을 권유하셨었다. 한 학기지만 지방 고등학교 내신 평균 5등급이 찍힌 성적표로는 내가 원하던 대학과 학과들은 모두 극상향 지원이었다.
5. 어찌저찌 방황(?)과 고민을 하다 은사님을 만나고 (이분과의 에피소드에 대해선 할 얘기가 많다만 생략하련다) 이상한 동아리에 들어갔고 거기서 3D프린터랑 아두이노 같은걸로 이상한거 만들면서 결국 수시 원서를 싹다 공대쪽으로 썼다. 이때는 의사 안해도 사람들의 생활 가까이에서 도움되는 기술 만들고 개발하는게 재밌다고 생각했었다.
6. 그러다 더 이상한 학과에 왔다. 물리 1, 2도 제대로 안했는데 (고등학교때 생명과학만 했었다. 다까먹고 안써먹는데 그때 물리나 할걸 잘못했다.) 입학하자 마자 슈뢰딩거니 뭐니 하면서 양자역학으로 괴롭히고 편미분도 모르는데 편미분방정식을 풀라고 하고 학기당 24학점씩 전공수업 때려박으면서 3년 안에 졸업하라고 장학금으로 칼들고 협박했다. 한 학기 등록금이 700인데 이건 협박이 맞다.
7. 1학년 1학기 물리 강의 중간고사에서 시원하게 꼴지를 했다. 다행히 기말땐 공부를 열심히 해서 나름 괜찮은 grade를 받긴했지만 물리에 대한 벽을 크게 체감했었다. 관심이 있었던 바이오 센서 같은거 다루는 랩실에선 물리 잘해야 한다고 해서 깔끔하게 생각을 접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후 통신/신호처리 랩실쪽을 쳐다봤더니 진짜 수학이 너무 많아서 딱히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1학년까지만해도 죽어도 CS는 안할거라고 했다. 나는 고딩때 별찍기에서부터 뇌가 코딩하는걸 거부했었던 학생이니까.
8. 그래서 당시엔 진심으로 의대 쪽의 의공학이나 의료데이터처리 연구실을 가야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다 정길이햄(지금의 지도교수님)을 만났다. 교수님이 존스홉킨스 출신이라 의대랑 협업도 많이하고 내가 고딩때 생각했던 헬스케어-공학의 교집합 어딘가에 있는 것들을 하는 것처럼 보여서 이 연구실에 인턴을 했고 좋은 사수형님을 만나고 대학원까지 왔다.
9. 본래 cs베이스가 탄탄하지도 않았고 앞서 이야기했지만 나는 어릴적부터 코딩에 재미를 붙이고 놀던 친구들과는 사뭇 거리가 있는 사람이다. 심지어 학부때 코로나 덕에 원격으로 진행된 수업들을 내가 열심히 들을리가 만무했고 또 학생회한다고 정신이 팔려서 시스템 코딩도 못하고 임베디드 코딩도 못하고 웹앱개발도 못하고 네트워크 통신도 잘 못하는 멍청 감자가 됐다. 그래서 그냥 데이터 분석하는 연구만 뒤지게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대-AI 딸깍 연구의 흐름에 편승해서 지금 하는 인공지능 연구들을 하게 됐다.
10. 그러다 싱가포르에 visiting researcher로 와서 다시 운동이랑 관련된 연구들을 하고 있다. 옛날에 재밌게 보던 근골격기능학이나 스포츠생리학 같은 레퍼런스도 보고 있으니 재밌다. 더욱이 내가 살면서 올림픽 나가는 선수들이랑 운동하고 얘기하고 데이터 분석하는 경험은 재밌고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름 내가 어릴적에 생각했던 모습과 비슷한 일들이라고 사료된다.
11. 하지만 돌고돌아 결국 결자해지다. 팬데믹 시기에 게을리한 전공 공부는 결국 발목을 붙잡고 나름 ‘임베디드 시스템’ 연구실에서 임베디드와 시스템 코딩을 제대로 공부해두지 않은 나는 라즈베리파이에서 I2C 핀에 센서를 물려서 통신하는 것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 결국 다시 다 공부하고 있고 고통스럽기 그지 없다. 1달이면 충분히 끝날거라고 생각했던 시스템 구현은 4달이 지난 지금도 아직 제자리에 있다. 다만 앞으로도 이런 재밌는 연구들을 하려면 이쪽 공부를 안할 수 없다.
12. 그래서 쫌쫌따리 공부를 제대로 해보려 한다… 수학과 물리를 시작으로 미뤄뒀던 NLP, LLM, PEFT 동네도 좀 더 보고, 하드웨어 관련된 부분, 임베디드 시스템이랑 컴퓨터 네트워크도 다시 좀 공부해야할 필요를 살갗으로 느끼고 있다. 미룬것도 나니까… 쩔 수 없다… 아무튼…
글을 줄이며... 19살, 아무것도 몰랐던 고3 당신이 대입 자기소개서에 적은 미래의 당신과 지금의 당신은 얼마나 유사한가? 누구처럼 어찌저찌 그 길 근처에 다다르고 있는가? 아니면 완전 다른 길을 걷고 있나? 또 N년 뒤의 당신은 과연 과거의 당신이 상상한 당신의 모습과 비슷할까 아니면 완전 다를까? 재밌는 상상이니 한 번 빠져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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